여행기/유럽

[아일랜드,코크] 타이타닉의 마지막 기항지 Cobh코브

트레브 2010. 9. 20.

타이타닉의 마지막 기항지로 알려진 코브항은 아이리쉬 이민의 중심이 있던 곳이다.  250만명 정도가 이곳을 통해 캐나다, 미국, 호주 등으로 흩어져 갔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고향 땅을 등지고 머나 먼 타국 행을 결정한 데에는 단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잘 살아보겠다는 것보단, 일단 굶어 죽지 않고 살아 보자는 생존의 목적이 컸다.

아이리쉬 이민의 가장 큰 원인은  Great famine 으로 알려진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이다. 1845 년 전국에 걸쳐 감자 마름병이 퍼짐에 따라 대부분 아이리쉬들의 주식으로 이용되던 감자를 수확할 수 없게 되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굶거나 그러인한 병에 걸려 죽고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은 생존을 위해 대서양을 건너갔다.  이로 인해 1845년에서 1852년 사이에 아일랜드의 전체 인구는 20 ~ 25 % 나 감소하게 된다.

<Famine Memorial in Dublin Custom House Quay>

감자 대기근에는  감자 마름병이 한 원인이기도 주요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헨리 8세의 종교개혁 후 아일랜드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카톨릭 교도들은 많은 박해를 받게되는데, 교육을 받을 수도 없었고, 재산을 소유할 수도 없었다. 경작지들은 영국인을 배를 채우기 위해 소 방목지로 바뀌고 가난한 농부들은 소작농으로 내몰리게 된다. 소작농들은 노동의 대가로 조그마한 경작지만을 겨우 받을 수 있었다. 그 경작지로 가족들의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은 감자농사밖에 없었고 그렇게 아일랜드의 주식은 감자로 바뀌어졌다. 

당시 아일랜드의 모든 산업은 붕괴되었고 오직 농업만이 있었는데, 아일랜드의 농민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궁핍한 삶을 살고 있었다. 반면 영국은 세계최초를 산업화를 이루어 번영 과 풍요 속에 살고 있었다. 아일랜드의 땅을 소유한 지주들은 대부분 영국인들로 한번도 아일랜드를 방문조차 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당시 한해 6백만 파운드 가량이 소작료로 영국으로 송금 되었다고 한다.

아일랜드 대 기근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굶주리고 있었고, 인구는 급속히 증가하고 있었으며 노동자의 3/4 가 일자리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 기근의 가능성은 간과되고 제대로 보고조차 되지 못한다.

아일랜드는 1782 ~ 1783 년도 이미 기근을 겪은 적이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어느 정도의 자치권이 있었기에 농작물 수출을 금지시켜 물가를 안정시켰으며, 기근을 벗어 날 수가 있었다. 하지만 1845년에 그러한 수출 금지 조치가 없었다. 1801 년 Act of Union 이 발효됨에 따라 그 전까지는 어느 정도의 자치권이 있었던 아일랜드는, 영국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된다. 자치권이 없었던 아일랜드의 영국의 손길만을 기다렸으나, 영국의 대책은 원활하지 못하다.

아일랜드 구제에 적극적이었던 총리는 선거결과에 따라 물러나고 보수당이 집권하게 되는데 이들은 영국·아일랜드 합병 철회론자 들로 아일랜드 구제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일랜드 구제를 위해 파견된 관리는 신이 아이리쉬들을 가르치기 위해 재앙을 내린 것이라 생각하며 아이리쉬를 살리는데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다.

영국은 별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대 기근 소식을 전해들은 전세계 나라들은 도움의 손길을 보냈다. 인도에 복무중인 아이리쉬 군인과 동인도 회사에 근무중인 근로자가 14000 파운드를 송금하고, 교황도 기금을 마련한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겨우 2000 파운드를 기부하는데 그치는데, 당시 오트만 제국의 술탄이 10000  파운드를 기부하려 하지만 여왕이 2000 파운드 밖에 기부하지 않았기에 1000 파운드만 기부할 것을 요청한다. 술탄은 1000 파운드를 보내고 3척을 곡물을 가득 실은 배를 보내다. 영국에선 화물선의 입항을 막으로 했지만 무사히 Drogheda 항에 입항해 터키선원에 의해 곡물이 하역된다.

대기근에 영국정부의 적절치 못한 대응은 결국 150만이 넘는 아이리쉬을 굶어 죽게 했고 간신히 살아 남은 사람들은 이민선에 오른다. 당시 한 지역에서 45 ~ 85 % 이르는 아이리쉬인들을 이민을 떠났다고 한다.  많은 이민자들이 이 코브항을 통해 이민지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운 땅에서 일해서 번 돈은 아일랜드에 송금에 다른 가족, 친척들의 이민경비로 사용되었다.

참 가슴 아픈 역사이다.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가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와 많은 비슷한 것 같아, 더욱 가슴에 아프다.  이런 아픔을 가진 곳으로 이제 가 보자.

코브는 코크에서 15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매시간마다 있는 기차를 타고 가는 것이 편하다. 

기차로 약 25분 정도 소요된다. 종착역이니 혹시나 잠에 들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천혜의 자연 피항지인 코브는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중요한 해군기지였다. 1800 년대 초 나폴레옹 전쟁 때 영국의 해군기지로 사용되면서 커졌고, 그때 많은 건물들이 세워졌다.  그 후 쾌적한 날씨 때문에 환자들이 많이 찾는 휴양지로 성장했으며 이민자들이 모여들고 대형선박들이 기항함에 따라 그에 수반되는 많은 산업들이 발달하게 된다. 

1849 년 빅토리아 여왕의 방문으로 Queenstown 으로 개명했던 코브는 독립 후에 원래의 이름을 되찾는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골목길을 걷다 보면 화려한 빛깔을 한 집들도 만날 수 있다. 같은 모습이지만 다채로운 색을 칠한 벽을 아름다움을 더한다.

타이타닉이 입항했을 당시엔 수심이 당시 세계에서 가장 컸던 타이타닉이 , 부두에 접안하기에 수심이 얕아서 바다 위에 닻을 내리고 묘박했었다고 한다. 이러한 조그만 배를 타고 많은 이민자들이 타이타닉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Clock tower Gallary > 

케네디 공원에 있는 배를 양손에 들고 있는 조각상은 먼 나라로 이민을 보내며 슬퍼하며, 무사히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진다.

 

<Immaculate heart of Mary pray for us> 정결한 성모 마리아여,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마리아 상이고 기도문이지만 여기 코브에서는 더욱 애뜻하게 느껴진다.

   

코브에서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오는 건물은 언덕 위에 높이 솟은 St. Colman’s Cathedral 인데 1868 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15년에 완성되었다.  세인트 콜 맨 대성당은 47 개나 되는 종을 가지고 있는데 가장 큰 종은 3440 kg 에 이른다.  5월과 9월 사이 일요일 오후 4시 30분에는  4 옥타브에 이르는 47개의 종으로 연주되는 종악을 연주한다. 나도 꼭 한번 들어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아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애니 무어와  남동생들 - 1892 년 1월 1일 뉴욕 앨리스 섬에 이민센터가 새로 문을 열었을 때 처음으로 입국허가를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제법 연륜이 있어 보이는 건물인데, 바로 사용되고 있다. 해가 지면 클럽으로 사용되나 보다. 문지기가 2명이나 되는데, 물 관리가 아주 잘 되는 듯하다.

   

밤이 되니 조그만 마을의 더욱 아름다움이 더해 지는 듯하다.

아이리쉬 브랙퍼스트 ,잉글리쉬 브랙퍼스트와 다른 점은 이름뿐. 영국이 싫으니 잉글리쉬 브랙퍼스트라고 할 순 없고, 그냥 똑같은 것 먹으면서 아이리쉬 브랙퍼스트 라고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잉글리쉬 브랙퍼스트 달라고 하면 밥도 못 먹고 쫓겨 날수 있으니  잉글리쉬 브랙퍼스트  절대 삼가해야 한다.

부두에 범선이 한 척 입항하는데 사람들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아서 보니 유니온 잭을 달고 있는 영국선적의 배다. 유니온 잭은 아일래드에서 절대 환영받지 못하지. ㅋ

 

기차역 옆에는 Heritage 센터가 있다. 이민 당시의 상황을 묘사해 놓은 그림과 조각상이 있으니 한번 둘러 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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